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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Travel)/이스라엘

[스크랩] 제3차 중동전쟁 1-"6일 전쟁" 속전속결! 이스라엘 공군 미라쥬 III의 기습작전

woodsmell 2016. 1. 22. 23:02

 

(1967년 6월 23일 라이프紙 커버 사진은 "6일 전쟁"중에 수에즈 운하에 몸을 담구고

더위를 식히고 있는 어느 이스라엘 병사의 모습입니다. 1967년 6월 "6일 전쟁"

(제3차 중동전쟁)은 상식적으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결과로 끝을 맺으면서

 현대전 사상 초유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1948년 제1차 중동전쟁과 1956년 제2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은 중동 지역에서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한 나라로써 인식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전쟁에서의 승리는 이스라엘이 절대 아랍 주변국들에 비해서 많은 숫자의 병력과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도리어 아랍 국가들은 소련으로부터 온갖 신형 무기들을 구입하였고 심지어 미국과 유럽 국가들로부터 무기를 자유롭게 구입할 수 있었던 반면에 이스라엘은 소련으로부터의 무기 구입은 아예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미국도 소련과 아랍 국가들의 눈치가 보여서 편하게 이스라엘에게 무기 공급을 해줄 수 있는 입장이 못되었습니다.

 

그런 탓에 이스라엘은 대부분의 탱크와 전투기들은 프랑스제에 의존하거나 구형 셔먼 탱크를 개조한 슈퍼 셔먼 시리즈를 운용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난 두번의 중동전쟁에서 보여주었 듯이 이스라엘군의 맨 파워는 아랍 어느 나라들에 비교해도 월등한 수준이었습니다. 강도 높은 훈련과 투철한 애국심으로 무장한 전투기 조종사들과 지상군 병력들은 가히 일당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고 겉 모습은 아랍 열국들의 군대에 비교해서 "다윗"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전에서 그들의 위력은 "골리앗"에 더 가까웠던 것입니다.

 

제3차 중동전쟁(이후 "6일 전쟁")은 1967년 6월에 발발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전쟁의 결과로써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와 요르단 강 서안의 지배권을 획득하여 옛 팔레스타인 전 지역을 마침내 통일하였고 이집트 영토였던 시나이 반도와 시리아의 골란 고원까지 점령하였습니다.

 

이야기를 시작하기 앞서서 "6일 전쟁"의 결과로 바뀐 중동 지역의 지도를 한 눈에 한번 흝어보는 것이 앞으로 제글의 이해에 큰 도움이 될 듯 싶습니다.

 

 

(흰색 부분은 원래 이스라엘 지역입니다. 그리고 1967년 "6일 전쟁"의 결과로

이스라엘이 새롭게 점령한 지역은 회색 지역으로 표시됩니다. 위에 지도에서

기억하셔야 할 뽀인트는 두가지입니다. "Golan Heights"라고 써있는 지명이

바로 시리아와의 전투 지역인 골란 고원이고 이스라엘 서쪽에 시나이 반도의

위치 확인하시고 다음 글을 읽으시길....)

 

6일 전쟁의 원인

 

1956년 수에즈 운하의 소유권을 이유로 발발했던 2차 중동전쟁은 이집트에 대항하여 함께 참전한 영국-프랑스 군들의 미미한 전공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이스라엘군의 강력한 군사력은 불과 몇개월 만에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고 수에즈 운하에서 이집트군을 축출하였습니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의 압박과 국제연합의 중재로 영-프-이스라엘군 모두 시나이 반도에서 철수해야 하였고 반도 전체가 비무장지대가 되어 유엔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게 됩니다.

 

당연히 드넓은 시나이 반도를 손에 넣었다가 외압에 의해서 포기해야 했던 이스라엘군은 원통할 수 밖에 없었지만 그나마 성과라면 시나이 반도 남단의 이집트 요새 샬롬엘 쉐이크가 비무장 지대에 포함됨에 따라서 이스라엘은 홍해로 빠져 나가기 위한 유일한 관문인 아카바 항을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흘러 1964년 아랍측에서는 요르단의 암만을 본부로 하여 훗날 이스라엘의 눈에 가시가 되는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결성하였는데 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 및 게릴라 투쟁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과 아랍 진영의 긴장과 갈등을 부채질하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수상이었던 골다 메이어는 건강이 매우 악화된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을 순회하며 연설하여 많은 유태인들과 이스라엘 지지 세력으로부터 전쟁 준비를 위한 자금을 모금하였고, 이스라엘의 국방 장관아었던 모셰 다얀은 프랑스를 비롯한 서방 선진국들로부터 무기 구입을 위한 적극적인 협의를 진행하였습니다.

 

 

(PLO(팔레스타인 해방 기구)는 1969년 공식 출범하지만 1964년부터 사실상의 대이스라엘 저항 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활동하였습니다. 사진은 1969년 공식 출범식을 갖는 PLO 지도자들, 가운데 선글라스를 낀 사람이 바로 그 유명한 PLO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입니다. 2004년 그는 갑작스럽게 병사를 하게 되는데 이스라엘 모사드의 독살이라는 음모론

이라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한편 시리아는 바로 인접해있는 이스라엘과 사사건건 충돌을 일으키게 되는데 특히 철저한 반유대주의와 반 서구주의를 주장하는 바아스 당이 시리아의 실권을 장학한 후에 국가수반인 아인 하페즈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더욱 강경정책으로 일관하게 됩니다. 

 

당시 시리아와 이스라엘 국경 지역인 골란 고원을 중심으로 양국간에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시리아와 이집트가 1966년 10월 군사 동맹까지 맺게 되자 또 다시 이스라엘을 상대로 아랍 열국들이 떼거지로 맞짱을 뜨려는 험악한 분위기에 휩쌓이게 됩니다. 제1차 중동전쟁(1948년~1949년)의 결과로 골란 고원은 양국 사이에 비무장지대로 결정되었으나 시리아는 골란 고원에서 이스라엘인들이 들어가 농작물을 경작하겠다는 일방적인 발표를 하자 마침내 시리아의 분노가 폭발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6일 전쟁"의 시발점인 이스라엘과 시리아 간에 무력 충돌의 원인입니다. 일단 양국의 전투가 시작되자 기다렸다는 듯이 시리아와 요르단은 "큰 형님" 이집트의 개입을 요구하였고 이미 약 10년전에 이스라엘군의 강력한 공격으로 실각 위기까지 갔던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 역시 2차 중동전쟁에서 겪었던 치욕을 설욕하겠다는 마음 뿐만 아니라 이집트 역시 이스라엘이 위협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것은 다른 아랍국가들과 차이가 없었으므로 이스라엘에게 "만약 시리아를 공격하면 이집트는 바로 이스라엘을 공격하겠다"는 강력한 의지 표명을 하게됩니다.(문제는 나세르만큼 그의 각료들이나 군 지휘관들이 강력한 전쟁의 의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가 이미 전쟁을 기정 사실화 하고 전쟁 준비를 서두르고 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지체없이 1967년 5월 29일에 북쪽에서는 시리아, 동쪽에서는 요르단, 남쪽에서는 이집트와 동시에 상대하는 전쟁 체제에 돌입하게 됩니다.

 

1967년 6월 5일 새벽 - 전쟁 시작했다, 그리고 바로 승부가 갈리다!

 

프랑스제 전투기들로 구성된 이스라엘 공군은 공격 개시 3시간안에 아랍측 공군기지를 공습하여 무려 400대의 전투기들을 파괴하였습니다. 이중 286대가 이집트 공군의 전투기들이었고 이런 선제 공격은 덩치만 믿고있던 이집트를 순식간에 패닉에 빠뜨리는 성공적인 기습이었습니다. 놀랍게도 이런 엄청난 전공을 세운 이스라엘 공군의 손실은 고작 19대였습니다. 전쟁 발발과 함께 이스라엘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한 가운데 곧바로 이스라엘 지상군은 시나이 반도로 진격하여 순식간에 북진하여 10년전에 손아귀에 쥐었다가 포기했던 수에즈 운하까지 도착하게 됩니다.

 

 

(1967년 6월 5일 전쟁 개시일 아침에  시나이 지역으로 진군하는 이스라엘 지상군의 센츄리언 탱크들과

프랑스제 전폭기 Vautour II )

 

이런 전광석화와 같은 이스라엘의 공격은 이집트 군 시설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고 그 결과 2차 중동전쟁에 이어서 다시 한번  이집트군을 초반에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었습니다. 전쟁 발발 불과 4일 만에 이집트군은 국제연합이 제안한 정전 권고를 수락하며 치욕수러운 모습을 보입니다.

 

아랍 국가들의 고질적인 문제, 쉽게 뭉치지만 상호불신의 모래알 단결력

 

시리아는 전쟁 전까지 이스라엘에 대해서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적대적인 태도로 일관했던 나라지만 일단 전쟁이 시작되자 이스라엘은 치밀하고 신속한 공격으로 적을 제압한 반면에 시리아는 정작 군사 동맹까지 맺었던 이집트와 공고한 공조 체제를 구축하지도 못한데다가 소극적인 전투 대응으로 시나이 반도에서 이스라엘에게 이집트가 난타를 당하고 있던 전쟁 초기에 망연자실하고 손을 놓고 있는 바람에 시나이 반도에서의 이스라엘 작전은 성공을 거둘 수 밖에 없었습니다.

 

시나이 반도를 점령한 이스라엘 주력군은 이번에는 동쪽으로 넘어와서 골란 고원에 시리아와 전투를 위해서 신속하게 이동하였고 시리아는 이스라엘 주력 부대인 기갑 부대가 골란 고원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국제연합의 정전 권고를 이집트와 마찬가지로 수락하였습니다.

 

 

("6일 전쟁" 중에 이스라엘의 프랑스제 경전차 AMX-13, 이집트의 소련제 T-55에 비하면 장난감같은

성능이었지만 신속한 기동력으로 적 기갑부대의 위치를 파악하는 정찰 임무에 큰 효과를 보여줍니다.)

 

한편 동쪽에 요르단 역시 이스라엘 공군이 제공권을 장악하자 초반에 위축되어 국제연합의 정전 권고를 수락하였는데 결국 "6일 전쟁"이라고 하지만 요르단은 불과 3일만에, 이집트는 4일만에, 시리아는 5일만에 정전 권고를 수락한 셈입니다.

 

도대체 6일 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인가?

 

지상 최대의 작전 - 4개국을 상대로 한 이스라엘 공군의 단 하루 동안의  기습작전

 

1967년 6월 5일 새벽 이스라엘 공군 미라지 III 전투기들은 4대씩 편대를 이루어 지중해 해면을 날아 이집트 공군기지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미쳐 이스라엘의 기습을 예측하지 못한 이집트 공군은 허둥지둥 당황하였고 지상에서 제대로 이륙도 못해보고 엄청난 숫자의 소련제 신형 미그-21기들이 이스라엘 전투기의 폭격으로 허무하게 파괴되었습니다. 흣닐 군사 전문가들은 이날의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은 항공기가 전쟁에 사용된 이래 가장 완벽한 기습 작전이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엄청난 성공이었습니다.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공격에 파괴된 이집트 미그-17 전투기)

 

여기서 한가지 의문점은 당시에 이미 레이더 방공 시스템이 구축되어있던 이집트 공군이 어떻게 이렇게 무력하게 당할 수 있었는가? 이집트 공군 기지는 한두곳이 아니었고 넓은 사막 지대에 수십 곳에 분산되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스라엘의 공습에 대비한 레이더 감시망도 운영 중이었습니다. 여기에는 그 당시에 이미 세계 최고 첩보기관 중에 하나라 평가되던 모사드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모사드는 아랍 주변군의 비행장 위치 및 상세 정보는 물론 심지어 적국 공군 조종사들의 가족 사항과 레이더 요원들의 근무 습관까지 완전히 분석하여 절묘한 타이밍으로 수립한 기습 작전이었던 것입니다. 또한 통계상 아랍 공군과의 공중전에서 압도적인 격추 능력을 보여준 탁월한 이스라엘 공군 조종사들의 역량이 또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기습 작전을 200% 성공적인 결과로 마무리 짓게 합니다.

 

 

(이스라엘 공군에 의해 완파된 이집트 폭격기들)

 

시리아와 요드단 공군 역시 이집트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았는데 이스라엘 공군이 일제히 기습 공격을 한지 불과 25분만에 두 나라의 공군은 완전히 궤멸되어 버립니다. 6일 전쟁 기간 동안 아랍측 전투기가 이스라엘 본토를 공습한 것은 단 1회에 불구한데 이라크 공군에서 이스라엘의 기습에도 불구하고 간신히 살아남은 TU-16 폭격기가 이스라엘 나타냐 지역에 3~4발의 폭탄을 투하하였으나 즉시 보복 공격을 시작한 이스라엘 공군기들이 이라크가 보유한 신형 미그-21 대대를 완전히 파괴해버립니다.

 

 

("6일 전쟁" 이스라엘 공군 기습작전의 수훈갑은 단연 프랑스제 미라쥬 III  전투기였습니다.)

 

 

(미라쥬III 이스라엘 공군 도장 예, 이 걸출한 전투기도 언젠가 심층 보고가 필요한 기종입니다.)

 

혹자는 이스라엘 공군의 이 전설적인 기습 작전을 2차대전 중에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과 비교하려는 시도가 있습니다. 하지만 진주만 공격은 정보의 착오로 정작 가장 중요한 공격 목표였던 미국 항공모함들은 공격 당일 진주만에 없었고 그런 탓에 애꿎은 순양함과 구축함들만 격침되었지만 실제로 진주만 공격이 미국 해군(해군에 소속된 공군력 포함) 전력에 치명타를 주었다고는 전혀 인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작전은 세밀한 정보 수집과 분석으로 짜여진 대규모 기습 작전 계획을 최고의 기량을 가진 이스라엘 조종사들에 의해서 한치의 오차도 없이 진행한 결과 이집트,시리아,요르단,이라크 이렇게 6일전쟁에 참전한 4개국의 공군력을 단 하루만에 완전히 무력화 시켰다는 점에서 "기적"과 같은 성공이었던 것입니다.

 

 

(1941년 진주만 공격은 미해군의 주력 항모들을 모두 놓쳐버린 상황에서 실제 전투에서 큰 위협이 되지

않는 순양함과 구축함들만 격침시킨 탓에 향후 미국과의 전쟁에서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고 할 수 없는

실패작이었습니다. 도리어 태평양 전쟁 참전을 위한 미국 국민의 일치 단결을 이루어준 사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작전은 다수의 표적들을 절대 놓치지 않고 철저하게

파괴하여 무력화 시킨 신출귀몰한 작전이었고 기적을 일궈낸 작전이었습니다.)

 

 

("6일 전쟁" 첫날 아침에 이스라엘 공군에 의해 완파된 이집트 최신형 미그-21 전투기들, 대부분이

변변히 이륙해서 공중전도 못해보고 이런 식으로 이스라엘 미라쥬 전투기의 기관포와 미사일 공격

으로 박살이 나버리곤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기갑부대 - 구닥다리 탱크들로 소련제 최신형 탱크들을 전멸시키다.

 

1965년 6월 5일 아침, 이스라엘 공군 전투기들이 기습 작전을 위해 비행장을 이륙한지 얼마 안된 시간에 시나이 반도 진격을 위해 전진 배치 중이었던 이스라엘 지상군 3개 사단(6만5천명의 병력과 650대의 탱크들)에게 드디어 진격 명령이 떨어집니다. 광활한 사막에 대형을 이루고 기다리고 있던 탱크들을 선봉으로 그뒤를 따르는 지상군들은 시나이 사막 지대로 거침없이 나아가기 시작한 아침 7시 45분경에는 이미 이스라엘 전투기들의 공습으로 수십개의 공군기지들이 불바다를 이룬 다음이었습니다.

 

 

(타미야제 영국군 버전의 센츄리온 마크3 탱크 키트 박스 아트, 센츄리온 탱크도 "6일 전쟁" 기간 중에 소련

신형 T-55 탱크들을 박살내버린 주공격수로써 큰 전공을 세웁니다. 훗날 슈퍼 셔먼처럼 이 영국제 탱크에

이스라엘은 105mm 주포로 화력을 강화하여 Sho't라는 이름의 개조 탱크를 개발하여 1970년부터 사용합니다.) 

 

2차 중동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군의 진격에 이집트 지상군의 방어는 무력하게 무너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결국 전쟁 개시 불과 몇시간 후에 시나이 반도 중심 도시 라파가 점령되었고 이집트 군은 완전히 혼란 속으로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스라엘 공군의 기습 작전의 성공 이유가 모사드의 치밀한 정보 수집과 분석에 따른 정교한 기습 작전 수립과 이를 수행하는 출중한 공군 조종사들의 활약 덕분이라면, 지상군의 파죽지세의 공격과 그 엄청난 성공의 원인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첫째, 지상군의 공격이 시작하던 그 순간 이집트 전방 부대 사단장들 중에서 아무도 제 위치를 지키는 지휘관이 없었다는 어처구니 없는 사실입니다. 그날 시리아 사령관 아메르 원수가 이집트를 방문하기로 되어있어서 주요 지휘관들은 모두 그를 영접하기 위해서 근무지를 이탈하여 발타미아에 모여있었습니다. 이스라엘 지상군이 기습 공격을 가할 때 정작 지휘관이 없던 이집트의 각 부대들은 더욱 더 혼란이 가중되었던 것입니다.

 

둘째, 이집트 군의 통신 보안에 대한 방심과 안일함이 이스라엘의 승리에 한몫을 담당합니다. 단적인 예로 칸 유니스로 진격하던 이스라엘 기갑부대는 이집트군이 무려 10년전에 2차 중동전쟁 당시 사용하던 무전기 채널을 그대로 사용하는 바람에 기습 공격을 받고 우왕좌옹하면서 자기들끼리 무선을 주고 받는 이집트군의 무전 내용을 진격하는 도중에 고스란히 청취하면서 이집트군의 동향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군이 역정보를 동일 무선 채널로 흘리는 바람에 이집트군은 더욱 더 혼란을 겪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슈퍼 셔먼 M51 탱크는 센츄리온과 함께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주력 전차로 활약합니다.)

 

칸 유니스는 2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군이 무려 200명의 팔레스타인 난미들을 학살한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역사의 치욕을 쉽게 잊고 방만한 방어 태세의 이집트군은 다시 한번 이스라엘군에게 이곳을 점령 당하는 어리석은 역사를 반복하게 됩니다.

 

세번째, 2차 중동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이집트군은 훈련을 소홀히 한 탓에 소련의 최신형 무기를 공급 받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습니다. 한 예로 이스라엘 탱크가 접근하자 이집트군들은 소련제 대전차포를 이스라엘 탱크를 향해 발사했습니다. 하지만 포탄은 이스라엘 탱크 위를 날아서 훨씬 뒤에 이집트 마을 한복판을 "타격"(?)하였습니다. 비싼 소련 무기들을 보유했지만 충분한 훈련이 안되어있던 이집트군은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소련제 T-55 탱크는 이스라엘이 사용했던 슈퍼 셔먼, 센츄리언, AMX-13와 비교하여 다음 세대의 탱크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뛰어난 신형 탱크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을 운용하는 이집트 군의 맨파워와 지휘관의 역량에

따라서 이렇게 훌륭한 탱크들이 "6일 전쟁"에서는 이스라엘 탱크들에 의해 학살되었습니다.)

 

6월 5일 점심때가 되어서 이미 시나이 반도의 절반 이상이 이스라엘군에 의해 점령된 상황에서 아직도 명확한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이집트군은 효과적인 대응은 커녕 귀중한 시간만 낭비하고 있었습니다. 오후에 간신히 전열을 갖춘 이집트 기갑부대는 진격해오는 이스라엘 기갑부대와 제대로 된 교전을 시작하지만 최신형 T-55 탱크를 비롯한 소련제 탱크들로 구성된 이집트 최정예 기갑 사단 조차 2차대전때 사용된 미국 M4 셔먼 전차를 개조한 M50/51과 프랑스제 AMX-13 경전차로 구성된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훌륭한 탱크를 가지고 있어도 조종하는 기갑병들의 능력에서 현저한 차이가 있는 탓에 기본적으로 포격 명중률이 터무니 없이 떨어지는 이집트 탱크는 강도 높은 사격 훈련으로 단련된 이스라엘 탱크의 포격에 순식간에 불덩어리로 변했습니다.

 

통상 적 탱크를 발견한 시점에서 900~1,200미터 이내에 초탄을 발사해야 하는 것이 그당시 전차전 교전 원칙이었는데 이스라엘 탱크는 이렇게 발사한 초탄 또는 제2탄이 예외없이 이집트 탱크를 명중시킨 반면에 이집트 탱크는 근거리까지 이스라엘 탱크가 접근해도 제대로 명중시키지 못하는 부실한 사격 실력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근거리에 사격하려고 숨어있던 이집트 탱크들은 제공권을 장악한 이스라엘 공군에게 발각되어 기관포 세례를 받곤 하였습니다.

 

어처구니 없는 전차전의 승리의 한 예

 

전쟁 개시일 아침에 발진했던 이스라엘 전차 부대들 중에 예비역으로 구성된 요페 사단 소속 기갑 여단이 36마일의 험로를 달려서 빌라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저물었을 때입니다. 밤 10시에 어둠 속에서  최신형 소련 T-55 탱크로 구성된 이집트 기갑 1개 여단이 자신들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이스라엘군은 크게 당황하였습니다. 이스라엘군이 보유하고 있는 AMX-13과 M51 탱크들은 야간 적외선 조준장치가 없는 상태였으므로 그런 장치가 장착된 적의 소련제 탱크들과 야간에 교전을 한다는 것은 눈가리개를 하고 눈 뜬 복서와 권투를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만약 이집트 탱크들이 어둠 속에서 적외선 조준으로 정확하게 포격을 가한다면 1개 여단의 이스라엘 탱크들은 전멸도 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정말 어처구니 없는 행운이 이스라엘군에게 찾아오게 됩니다.

 

이집트 탱크들은 아직 이스라엘 탱크를 발견 못한 상황에서 언덕을 넘어오고 있었는데 밤하늘 달빛에 언덕 위에 나타난 이집트 탱크들은 비교적 선명하게 식별이 가능했으므로 선봉에 탱크들을 향해 이스라엘 탱크는 정확히 포격을 가했습니다. 몇분도 안되는 최초의 기습 포격으로 언덕 위에 T-55 이집트 탱크 7대가 파괴가 되었고 뒤 따라오던 이집트 탱크들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뜻밖에 포를 난사하면서 후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적외선 조준장치로 차분하게 조준하여 포격을 가했다면 달빛에 의지하는 열악한 상황에 이스라엘 탱크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겠지만 난사하는 포탄들은 이스라엘 탱크들을 전혀 명중시키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이집트 기갑부대는 허둥지둥 사막에 형성된 와디(물이 말라버린 강바닥)를 따라서 도주하다가 무거운 탱크 무게를 이기지 못한 와디의 지면에 파뭍혀서 발이 묶여버리고 맙니다. 이스라엘 탱크들은 아무리 적외선 조준장치가 없다고 해도 강바닥에 쳐박힌 이집트 탱크들을 향해 집중 포격을 쏟아부어 궤멸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결국 날이 밝자 야간에 어림 짐작으로 쏟아부은 포격이 대부분 명중을 하여 무려 50대의 신형 T-55 탱크들이 완파된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됩니다. 

 

차라리 이런 무능한 이집트 기갑 부대보다는 시나이 사막 요소 오소에 매설해둔 이집트군의 지뢰밭과 시나이 반도의 험난한 지형이 이스라엘 군에게는 큰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이집트보다 더 무서운 적 - 팔레스타인 게릴라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에 대한 이스라엘의 가혹 행위는 이미 이스라엘 건국 훨씬 이전부터 영국의 괴뢰 경찰 조직으로 활동하던 하가나와 그 이전 유태인 무장 조직들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영국 식민 통치하에서 똑같이 지배를 받는 입장이었던 유태인과 아랍인들은 식민 정부에 대한 접근이 전혀 달랐습니다. 유태인들은 영국 정부와 협조하여 마치 일본 강점기에 조선인을 가장 괴롭혔던 인간들이 같은 조선인 고등계 형사였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같은 피식민지인인 처지에 영국이 식민 통치를 하기에 훨씬 편리하도록 아랍인들을 통제하는 경찰 조직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이스라엘 정부의 국방 장관인 모셰 다얀도 당시에는 하가나 조직에 지도자 중에 한사람이었고 제2차 중동전쟁(1956년)에 시나이 반도 진격의 과정으로 가자 지구와 시나이 지역에서 자행된 팔레스타인 난민들에 대한 이스라엘군의 학살 행위는 과연 2차대전 나치 독일의 유태인 말살 정책과 무슨 차이가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1967년 6월 7일 가자 지구에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을 완전 진압한 이스라엘 보병 여단)

 

바로 이런 배경에서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의 이스라엘에 대한 적대감과 원한은 이집트와는 비교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쫒겨난 난민들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20사단은 이집트군보다 더 집요하고 철저하게 가자 지구를 점령한 이스라엘군을 공격하였는데 정규군이 아닌 게릴라 부대로써 그들의 공격은 이스라엘군에게 가장 힘든 상대였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군은 최정예 예후다 보병 여단을 가자 지구에 급파하여 60명 전사에 200명 부상의 피해를 감수하고 팔레스타인 게릴라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결과 6월 6일 아침 해가 뜰 때까지 팔레스타인 20사단을 무력화하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출처 : 빈이네 작업실
글쓴이 : 따블오남편(김준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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