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열린 삶의 축복
마가복음 11장 11-14절
<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 >
성경을 보면 가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나옵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대표적인 본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한 종려 주일 다음날, 주님은 베다니의 삼남매의 집에서 나와 예루살렘으로 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에 시장기가 있어서 무화과나무 열매를 얻고자 무화과나무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잎사귀 외에는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무화과나무의 열매가 맺힐 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했습니다. 본문 14절 말씀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나무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제자들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는 주님의 말씀을 기이하게 들었습니다.
결국 마가복음 11장 20절 말씀을 보면 다음날 제자들이 그 길을 가다가 무화과나무를 보니까 무화과나무가 뿌리로부터 말라죽어 있었습니다. 뿌리로부터 말라죽었다는 것은 말라죽은 지 꽤 오랜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주님의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그대로 무화과나무가 말라죽은 것입니다.
이 장면을 보면 예수님은 성미가 급하고, 격정적이고, 분노를 자주 표출하는 분 같습니다. 열매가 맺을 때가 아닌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찾고, 열매가 없다고 참지 못하고 금방 나무를 저주해 말라버리게 하니까 예수님은 인격적인 분이 아닌 것 같고 합리적인 분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무신론자들이 예수님을 공격하는 대표적인 본문으로 삼고 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렇게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습니까? 사실 이 무화과나무 사건은 그 당시 형식적인 신앙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을 향한 하나의 예표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즉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는 당시 형식적인 신앙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전형적인 모습이었습니다. 그런 모습에 대한 주님의 분노가 바로 무화과나무 사건에 담긴 것입니다.
왜 그런 분노가 있게 되었습니까? 그 실마리가 본문 11절 말씀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사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그 사건이 있기 전날 종려주일에 주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성전을 둘러보시고 마음속에 거룩한 분노를 가지셨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성지 순례를 오는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이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때 성전 안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묵인 아래에서 장사꾼들이 성전을 장사하는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멀리서 양과 염소와 비둘기와 같은 제물을 들고 오기가 힘드니까 성전 근처나 심지어는 성전 안에서 제물을 사서 죄 사함의 제물로 바치고 있었습니다. 그런 형식적인 신앙을 이용해서 성전 안에서 제물을 파는 사람들은 보통 시가보다 10배 이상의 값이 매겨 폭리를 취하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은 그런 모습을 묵인하며 장사꾼들이 주는 뇌물을 받아먹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담기지 않은 형식적인 신앙과 겉으로는 가장 경건한 척 하면서 속으로는 장사꾼이 된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잎사귀만 무성한 나무’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한 것은 당시 형식적인 신앙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또한 그 경고는 우리를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 하나님의 경고 나팔 >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두 가지 통로가 있습니다. 하나는 특별 계시입니다. 그것은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의미합니다. 또 하나는 일반 계시입니다. 일반 계시란 성경 말씀 이외의 모습으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말합니다. 흔히 말하는 3대 일반 계시에는 역사, 자연, 양심이 있습니다.
역사를 잘 살펴보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예를 들어, 히틀러가 보여준 비극적인 역사를 생각할 때 우리는 “히틀러처럼 살지 말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양심도 마찬가지입니다. 양심은 우리 안에 있는 내적인 음성입니다. 그것은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은 아니지만 말씀으로 순화될 때 양심은 상당히 하나님의 음성과 근접한 음성이 됩니다.
자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느끼고, 반대로 자연 재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 사건이나 자연재해 등의 사건은 자연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장면과 그런 환경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과 경고의 음성을 함께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사건은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다 하나님의 섭리 하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칼 발트라는 유명한 신학자는 성도는 한손에는 성경을 들고, 또 한손에는 신문을 들고 시대의 돌아가는 상황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처럼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로 듣고, 그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서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경고로 들으며 깨어 근신하는 것이 지혜로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에 나오는 이 무화과나무 사건은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에게 “깨어 근신하라! 잎사귀만 무성한 열매 없는 교인이 되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가끔 우리는 우리 이웃이 예상치 못한 불행을 당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불행은 그의 죄가 우리보다 많기 때문에 당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가끔 보면 불행을 당하는 사람이 특별한 잘못이 없는 상태에서 오히려 내가 죄가 있기 때문에 나를 경고하기 위해서 주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웃의 불행을 보고 어리석은 사람은 이런 생각부터 할 것입니다. “그 사람, 무슨 죄가 있나? 회개할 것이 있나보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이런 생각부터 할 것입니다. “나를 향한 경고의 나팔이다. 더욱 깨어 근신하며 기도에 힘쓰자!”
가끔 우리는 이웃 나라의 큰 불행을 봅니다. 지진으로 수만 명이 한꺼번에 죽고, 쓰나미로 수십만 명이 죽는 얘기를 듣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 어리석은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곳은 소돔과 고모라야! 그러니까 벌을 받지.”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 불행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고 나팔이다. 더욱 깨어 근신해야 하겠다.”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나에 대한 경고 나팔을 불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내 사랑하는 자녀에게 사고가 닥치고, 불행이 생기도록 허용하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 주변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잎사귀 신앙을 버리라는 하나의 경고의 메시지가 될 수 있습니다. 사후 약방문 식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사전에 경고를 받고 회개할 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 항상 깨어 근신하십시오 >
우리가 하나님의 경고 나팔을 잘 듣지 못하면 그 다음 징계 순서가 나 자신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경고 나팔을 잘 듣고 그 경고의 음성을 나와 연관해 생각하며 깨어 경성하는 마음으로 살면 완벽하게 살지 못해도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만 가지고도 시련과 불행을 상당한 정도까지 예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무감각하게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사건과 사고를 그냥 보아 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내 주변의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계속 열매 맺지 못하는 삶을 살면 그런 사건이 내 주변에서 터지고, 얼마 후에 조금 더 가까운 곳에서 터지고, 그러다가 결국 내 가족과 내 영혼을 터뜨릴 것입니다.
물론 내가 당하는 사고와 고난이 때로는 더 큰 불행을 예방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한 IMF 때의 고통은 우리나라에는 엄청난 불행이고 재앙이었습니다. 그러나 IMF가 있었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었고, 조금이나마 우리의 경제가 체질이 강해질 수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건 사고를 통해서 회개하고 더욱 깨어 근신하는 일입니다.
우리 앞에 벌어진 사건 사고는 전혀 의미 없는 사건 사고가 아닙니다.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사람의 희생적인 불행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다만 그런 불행의 당사자가 되지 않도록 미리 말씀으로 경고를 잘 받고 깨어 근신하는 삶을 산다면 그 사람은 가장 복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무화과나무 이야기도 우리에게 큰 사고와 불행 없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경고하시는 축복의 말씀입니다. 그 예표를 보고 느끼고 이제 생명의 길, 축복의 길로 들어서라는 경고를 받게 된다면 오늘 이 시간은 정말 복된 시간일 것입니다. 우리는 사건 사고와 불행을 통해서 경고 받지 말고 먼저 말씀으로 경고 받을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사고 없이 미리 말씀으로 경고 받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 말씀에 열린 심령이 되는 것처럼 복된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항상 말씀 안에서 깨어 근신함으로 시대를 잘 분별하고 지혜롭게 사는 복된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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